지난 5월 출간한 '복붙 개발자의 벼락 성공기'의 마지막 작업 중일 때 공역자이던 아내가 한빛미디어로부터 또 다른 책의 번역 의뢰를 받았다. 학창 시절에 세계 최초의 컴퓨터라고 배웠던(이후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졌다) 에니악(ENIAC)의 프로그래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라고 했다. 주제가 재미있어 보였고 복붙 개발자의 벼락 성공기에서도 그랬듯이 이 분야에서 더 다양한 성별, 인종 등이 활약하기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응원도 하고 싶은 마음에 함께 참여해도 되겠냐고 물었고 하기로 했다. 어차피 기계와 프로그램에 관해 궁금한 게 생길 때면 아내가 나를 붙잡고 물어볼 게 뻔했기 때문에 공식이냐 비공식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이 책의 한국어 판에 일조했을 것 같기는 하다.
익히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컴퓨터 프로그래밍 역사 초기에 활약했던 프로그래머 혹은 개발자에는 여성이 많았다. 인류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알려진 분 역시 에이다 러브레이스였다. 에이다 사후 100년이 조금 안된 시점에 최초의 "직업" 프로그래머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에니악에 관여했던 에니악 6인(원서에서는 'ENIAC 6'라 불렀다)이었다.
세계 최초(라고 배웠던) 컴퓨터의 이야기와 그 개발자들의 이야기라니. 듣기만 해도 흥미진진했다. 번역 샘플로 받은 프롤로그는 그 자체는 소소했지만 거대하고 충격적인 사실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까! 얼른 번역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번역을 시작하고 보니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책이 진행되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고, 좌절도 있었고, 안타까운 일과 슬픈 사건도 있었지만 이 책은 그 모든 일을 굉장히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게다가 몹시도 시시콜콜한 사실을 참고 자료까지 들먹이며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이 책이 다루는 역사적 사실이 지루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굉장히 재밌을 소재였고 약간의 양념(?)만 더하면 훌륭한 드라마가 될 수 있는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그 길을 가지 않았다.
그래서 몇 달간 번역하는 내내 툴툴거렸다. 작가인 캐시 클라이먼은 왜, 이만큼 흥미진진한 소재를 가지고도 이토록 지나치게 담백하게 기술하였는가. 그러던 어느 날, 나의 불평에 어느 정도 동의했던 아내가 나에게 말했다. 다 이유가 있었다고. 책 후반부 에필로그를 작업하면서 읽어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고 했다. 아직 그 부분을 읽어보지 못했던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결과적으로 말해, 에필로그까지 읽은 나는 툴툴거렸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지고 작가에게 속으로 불평했던 사실조차 미안해졌다. 자세한 이야기를 적자니 스포일러가 될까 봐 구체적으로 적지는 않겠다. 하지만 이 책이 역사적 사실 기반 픽션이 아닌 일종의 역사서를 지향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정도만 언급하려 한다. 아마도 작가는 그 방법이 역사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에니악 6인의 정당한 명예를 찾아 줄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 같고 나 역시 동의한다.
프롤로그에서 컴퓨터 박물관을 찾아간 젊은 대학생 캐시 클라이먼은 책을 덮을 즈음에는 어느새 50대 후반이 되어 있었다. 이 책이 우리 손에 오기까지 거의 40년이 걸렸다는 뜻이다. 그녀의 끈기 있는 작업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에니악 사진 속에 있는 여성들의 이름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참고 링크: 사라진 개발자들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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